성공회 소식/자료실 2014.05.15 08:41

한국과 세계성공회의 한 세기 - Terry M. Brown 주교

<성공회대학교 100주년 기념 신학특강>

 “한국과 세계성공회의 한 세기  (1914-2014)”
(Korea and A Century of the Anglican Communion, 1914-2014)

Terry M. Brown 주교 (토론토 Trinity College University, 캐나다 성공회)  
강연 : 2014년 4월 28일, 성공회대학교. 


서론

먼저, 모든 분들게, 특히 이재정 신부님께 감사함을 전하며, 성미가엘 신학교, 현재 성공회대학교의 한세기 역사와 관련지어 세계성공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나 기관이 세계와 격리되어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제가 역사와 병행시켜 말하는 것도 매우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네가지 영역에서, 과거 한 세기 동안 세계성공회의 역사를 보기로 하겠다: (1) 식민주의, 흡수합병, 탈식민화와 자치; (2) 평신도 세례 사목, 교단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3) 이데올로기, 그것이 자본주의이든, 맑스주의이든, 주체사상이든, 신자유주의든, 서구의 ‘포스트모던’이든; (4) 평화만들기와 화해 (여기서 한반도 평화를 담고싶다). 아마도 나의 강연 주제는 과거나 현재의 식민주의, 교단주의, 거짓 이데올로기, 전쟁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말하고 싶다. 여기서 교회적 관심, 세례 영역과 더 넓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심 영역 이 둘 사이는 샌드위치로 끼어 있다고 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영역들은 중요하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세계와 직면하기에 앞서 교회부터 먼저 보기로 하자.  

세계성공회와 식민주의 (1914-2014)

성 미카엘신학원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통제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건립되었다. 1904년과 1907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조약들과, 그리고 영일동맹(영국-일본)이 1905년에 10년을 갱신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자로 만들었고;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합병하고, 한국말과 문화와 정치적 열망을 억압을 시작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한국에 온 영국성공회 선교사들 (영국이 1차세계 대전 중에 일본과 조약을 맺었음에도)은 한국말과 문화를 매우 존중했다. 그것은 아마도 가령 F. D. Maurice (그의 The Kingdom of Christ 제1권의 마지막 장에서) 같은 신학자들, 그리고 그의 후학자들이 반식민적 선교의 글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를 세우려했지, 일본이나 영국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이처럼, 이때에 성공회신학교가 세워진 것은 일본 당국에 위협을 주기 시작했고, 1940년 3월에 민족주의적 요인으로 인해 폐교했다. 전쟁 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열망은 교회와 국가 모두에서 승리를 했고, 여러분들은 이로인해 예배, 신학, 사목, 지도력과 교회 (신학적이고 세속적 모두)에서 한국 교회에 자랑을 갖을 것이다.

(뒷줄 가운데가 이번 기념특강을 해주신 Terry M. Brown 주교)

많은 악들을 갖고 있는 일본의 식민지화를 겪은 한국은 지난 한세기 세계 주변에서 많은 성공회 역사들과 나란히 가고 있다. 처음 영국교회는 영국에서 나와 채플린들, 예를 들어 군목 또는 인도의 동인도 회사(1600년에 세워진)의 채플린들을 통해 지구 남반으로 이동했다. 그것은 경제적 약탈이 첫 목적이었다. 1701년 영국의 USPG 선교단체는 해외에 영국 정착민들과 이들 지역에 토착민들 모두에게 선교사들을 보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국 제국을 넘어서 활동했다. 1799년에 세워진 CMS는 유럽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공회 복음주의인데, 세계 곳곳에 선교사들을 보냈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화하려 했던 문화들에 대해서 대단한 존경심을 가졌는데, 특별히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고조에 오르면서, 다른 문화에 대한 존경은 인종적 우월주의와 모욕으로 자주 대치되었고, 그리고 이 인종들의 “장례” 또는 흡수 계획의 일환으로 이러한 계획이 시작했다. 특별히 이것은 영국민이 정착한 곳(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그러했고, 아프리카나 태평양의 “원주민”들에게서도 있었다.

캐나다 교회는 과거 수많은 원주민 인디안 어린이들의 죽음과 신체적 그리고 성적 학대와 문화와 언어를 못쓰게 한 것 결과들을 야기시킨 원주민에 대한 식민적인 합병의 죄를, 지금도 정부가 세우고 교회가 운영하는 원주민 학교들에서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유사한 흡수 정책은 2008년 호주 정부가 사과하면서,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하는, 원주민 어린이들의 입양을 통해서 원주민들에게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합병 정책들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정부가 서 파푸아의 멜라네시아 (Melanesia) 원주민들에게도 계속 실시하고 있다. 한국이 과거 36년을 견뎌냈던 일본의 합병 정책은 세계에 원주민들이 경험했던 일이며, 지금도 분명하고도 기묘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가 자주 관여되어 있거나 거기에 빠져있었기에, 성공회 지도자들은 지난 한 세기 넘게 식민적인 억압에 도전했던 원주민 지도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사회 운동가들을 밝혀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성공회 성직자이자, 마하트마 간디의 친구이었던 Charles Freer Andrews (1871-1940)은 인도 독립을 위해서 지칠줄 모르게 운동했던 사람이다. 남 태평양에서는, 뉴질랜드 웰링톤의 Octavius Hadfield 주교 (1870-1893)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정착민들인 마오리 족의 인권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변호했고, John Coleridge Patteson은 멜라네시아(Melanesia)의 퀸스랜드 설탕 농장에서 새 노동자들이 납치하여 첫 순교한 주교(1861-71)이었다. 최근에는 Walter Lini (1942-1999) 수사이면서 성공회 사제는 1980년 Vanuatu의 독립 국가를 위해서 프랑스와 영국에 반대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친 지도자이었다. 이 지역에서 여성 선교사들과 종교 선교사들이 성직을 거부하고, 남성 가부장주의와 폭력, 식민지와 지역 모두에 반대하며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저의 해석이 옳다면, 성공회대학교도 반 식민주의, 민족적인 자주, 그리고 비판적인 기독교인의 정치 이론과 실천이라는 성공회 전통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성공회대학교들은 늦게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성공회 선교사들이 엘리트들과 승리하고 겸손하거나 백성을 억압한 사람들보다는 민초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식민 역사가 깊게 상처를 준 원주민들 속에서 세계를 향한 정의와 자주를 위한 투쟁이었다.

세계 성공회와 평신도 세례 사목 (1914-2014)

1914년 성미카엘 신학원이 세워진 같은 해 세계성공회는 지금 키쿠유 논쟁(Kikuyu Controversy)라고 하는 것에 휩싸였다. 오늘날 케냐에 키쿠유에서 스코트랜드 교회와 케냐의  Mombasa 주교와 우간다의 주교들 그리고 CMS 선교단체와 교단간 상호 선교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에큐메니칼 미사에 참여했다. Zanzibar의 Frank Weston 주교도 이들 두 주교를 파면한 것에 항의하여 켄터베리 주교와 영국 언론에 불만을 제기하여, 보편적 질서를 위반했다는 것에 강하게 저항했다. 이 갈등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논쟁은 주교직(주교 서품과 성사와 관련한 것을 포함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견진성사, 그리고 세례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저는 그 시대에 한국의 트롤로프(Trollope) 주교가 Zanzibar 주교 편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삼위의 이름으로 물로 세례하는 에큐메니칼의 합의는 성체성사에서 모든 참여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예수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베품에 따라, 이 논쟁은 매우 낙후된 주제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제가 가장 나이 어린 어린이에게 세례를 줄 때는, 그 어린이가 성체성사를 받고 싶은지를 묻는다. 

세계 성공회의 지난 백년은 기독교 신앙의 성체성사가 계속되는 중심 주제로 세례의 회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교회에 어쩌다가 한번 갔다가, 견진 때까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교단이 무엇이든지, 나이나 성별 또는 장애인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은총이 가득한 세례 사목은 지속적인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성공회가 “선교의 주안점”으로 세례의 약속을 외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세례 목회를 강조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례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새신자에게 가르치고 세례주고 양육하며, 예배를 사랑하게끔 인간이 원하는 바에 응답하며, 사회의 불의한 구조들을 변화시켜 나가며, 모든 종류의 폭력에 저항하고 화해로 평화를 추구하며, 창조의 보존을 끈질기게 지키고,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다. 실제로 기초이자 근거가 되는 세례 외에도, 성직과 같은 은사(charisms), 종교 생활, 치유 목회 등으로 더 확장할 수 있겠다. 세례 목회는 근본적으로 에큐메니칼적이며 모든 기독교인들과 함께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성공회의 과거 한세기의 역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이 관여해 왔다. 에큐메니칼의 신앙과 직제 그리고 생명과 사역 운동들은 1948년 WCC를 만들면서 연결했다. 그리고 1961년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이 합류했고, 성공회는 국가적 차원의, 지역적 차원의 에큐메니칼 모임들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쉬에서 성공회는 연합교회 (United Churches) 형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교단적인 정체성들을 잃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중국의 성공회도 1950년대부터 삼자운동과 중국교회협의회(CCC, China Christian Council)dp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교단적 정체성을 잃었다. 그래서 중국 성공회의 팅 주교(1915-2012)가 이끄는 “탈-교단주의적” 교회를 만들었다. 반면 성공회 안에 한 분파인 앵글로-가톨릭은 이러한 연합 구조를 반대했고, 이를 부수는데 기여를 했다 (감리교와 함께하는 영국교회, 캐나다 성공회와 캐나다 연합교회, 호주 성공회와 호주 연합교회 등). 비록 가톨릭적인 성공회에서 조차도, 지금은 ‘세례’와 ‘연합’이 기독교 목회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성사로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교단적인 장벽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나의 질문은 성 미카엘신학교와 성공회대학교가 성공회의 정신을 1914년에 키쿠유 논쟁으로 나쁘게 시작한 에큐메니칼 정신에 얼마나 많이 반영시켜 왔는가를 보고 싶은 것이다.

세계 성공회와 이데올로기 (1914-2014)

영국 성공회의 사회 학자들은 1914년과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강한 관심을 갖었다. 19세기 중엽 Charles Kingsley, F.D. Maurice, Stewart Headlam, Scott Holland and Charles Gore 같은 인물들은 성마태 길드(1877) 조직과 기독교사회노조(1889)과 같은 조직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다양한 신학들을 내세웠다. 이들 기독교 사회주의 옹호자들은 성서와 초기 기독교 (사도 2장 44절이 핵심 본문인데, 첫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나누었다”)에서 사회적 교리들을 발견하려고 했고, 영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삶의 심각한 불평등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운동과 페이비어니즘(Fabianism)[각주:1]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끈질기게 시기가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는 것을 모토로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페이비언협회의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명칭은 지구전술(持久戰術)로 한니발을 격파한 고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 유래한다. 페이비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특정의 역사관·경제이론·정치학설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초기 지도자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 역사관은 점진적 진보의 낙천론 위에 서 있다. 즉 사회는 기술적 발달과 물질적 부의 증대에 의한 구성원의 행복의 증진이라는 방향으로 진보해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의 내부에 그 존속을 위협할 만한 파괴적 요소가 나타나면, 그것을 극복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한 결과 많은 부(富)가 축적되는 한편 노사의 대립이라든가 도시문제 등의 폐해가 생겼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정책이 대증요법식(對症療法式)으로 취해져 왔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의식적·계획적으로 폐해에 대한 극복책이 취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생활에 적용한 것으로서, 혁명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border="0">과 같은 세속 이론들과 사회주의의 실천들을 출현시키면서 대화를 하였다. 영국에서 앵글로-가톨릭 성직자들은 도시들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착취받는 지역에 뛰어들어가는 ‘빈민 성직’ 전통이 이러한 기독교 사회주의 전통의 한 부분이다. Frank Weston 주교는 필자가 키쿠유 논쟁과 연결시켜 말한 분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러시아 혁명과 맑스 이론의 등장 또는 가톨릭 십자군 (Catholic Crusade) 창설자인 Conrad Noel (1869-1942)과 같은 극단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이념은 기독교 맑스주의자가 되었고,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 해방신학의 선두주자들이 되었다. 필자가 연구했던 미국의 앵글로-가톨릭 맑스주의자인 F. Hastings Smyth (1888-1960)도 그중 한 인물이었다. SCC (?)의 한 멤버이었던 Archer Torrey 수도사는 1950년대 서울 성미카엘신학원의 교수 요원이었다. 한국에서 펼쳐진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나눔의 집’ 운동과 사회선교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정의, 경제적 분석과 혁명과 같은 세속 운동과 이념에 대한 이러한 강한 상호영향은 최소 19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세계성공회의 앵글로-가톨릭 전통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식민지의 합병에 반대하여 토착 문화와 언어를 지키려했던 성공회의 이러한 확신과 더불어, 이것의 신학적인 뿌리들은 성육신 (Incarnation)에 있다. 곧 하나님이 직접,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문화를 확신하고, 우리의 세상에서 예언하다 죽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신의 자기 비움’ (the divine self-emptying, 희랍어로 kenosis) 속에서 정의를 위한 변화를 취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모든 중요한 이념들이 진리 (모든 진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으면서, 이념과 함께하는 성공회의 상호영향은 성공회의 성서, 이성, 전통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성’이라는 성공회 정신에 반영되고 있다. (덜 지성적이고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공회의 복음 전통에서는 기독교가 세속 이념들로 대치하고, 이 이념들을 “세례” (baptize) (역주: 정화) 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신학적인 견해를 반영하면서, 이념들과 대화를 하는데 더욱 크게 조심해왔다. 가톨릭 성공회는 가령, 보편적인 인권 (개인과 사회 모두)의 이론과 실천, 가부장주의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적 분석 (많은 공동체에서 여성 부제, 사제 주교 서품에 대한 결과를 보이고 있음), 그리고 동종이형적인 성 (dimorphic sexuality)에 대한 비판, 그래서 성적 소수자들 (게이, 레스비언과 성전환자)을 하느님 창조의 합법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는 한국전쟁 이후 대한성공회가 인권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사회적 정치 이념들과 더불어 이러한 글로벌한 세계성공회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의 한 일원이 되고자 성공회대학교에서 사회과학 교수들의 강한 비판한다는 것을 읽었었다. 민중신학은 반식민주의에 대한 소신이었으며, 전체주의의 정치 질서에 대한 반대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제가 1988년에 캐나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에 방문했을 때, 우리는 주체 이념에 대한 북한의 연속되는 홍보를 들어야만했다. 우리는 비록 주체사상이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잘 움직이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기독교인들에게 이념적인 대화를 하는데에는 한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극을 받았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서 국가적 사회주의라든가 일본의 천황제 (Tenno System) 같은 경우는 악마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심지어 종교적인 것 (가령, 미국에서 창조과학회)과 같은 이념들에 대한 비판 역시도 이러한 성공회 전통의 한 부분이다. 현재에도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 경제 또는 소유욕이 강한 개인주의와 같은 것을 비판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로벌 이념들이 분명히 있다. 저는 성공회대학교가 이러한 비판에 관여한다고 확신한다. 

세계 성공회와 평화와 화해 (1914-2014)

1914년은 세계1차대전이 시작한 해이다. 1914년 8월 2일, Randall Davidson 캔터베리 대주교는 런던 Westminster Abbey에서 설교 중에, “현재 유럽에서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활동이 아니라 악마의 활동이라는 것”임을 선포했다. 전쟁 중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주교회의 (영국 성공회를 치리하는 중요 기관)는 영국이 독일 시민들에 대해서 독가스와 보복 공습하는 것을 반대했다. 대주교는 성직자에게 남자들에게 징집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행동은 정부와 일반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쟁, 그리고 국가주의와 종교의 과도한 흡수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발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영국교회는 ‘회개와 희망의 국가적 선교’ (a National Mission of Repentance and Hope)를 펼쳐나갔다. 1920년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 역주: 전세계 주교가 10년마다 모이는 주교회의)에서 나온 첫 여덟 개 항목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인식과 선한 국제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고, 국가 연합과 독일에 대한 승인,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를 종결하고, 계속되는 이러한 고통들을 구제하는 전쟁을 촉구하는 전후의 상황을 다루었다. 십년 후, 1930년의 람베스 회의에서 나온 25개의 결의문은 “이번 회의는 국제 분쟁들을 수습시킨다는 방법으로서 전쟁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례와는 함께할 수 없음”을 선포했다.

이와 유사하게 성공회 지도자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사려깊은 제재를 표현했는데, 그것은 치체스터 교구의 George Bell 주교가 독일의 드레스덴 (Dresden)과 다른 도시들을 폭격하는 영국 항공부대를 의회가 승인하게끔 한 처칠 수상에게 매우 분노했다. 1948년의 람베스 회의는 1930년에 나온 9번 항목인 전쟁 반대를 재추인했다. 그리고 15번은 UN의 활동을 결정했다. 더욱 최근에는 Robert Runcie 캔터베리 대주교는 1982년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설교 중에, 포크랜드 전쟁(Falkland War)을 일으킨 마가렛 대처 수상에게 분노를 표시했다. 세계 성공회는 평화와 화해의 깊은 전통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남아프리카, 캐나다와 솔로몬 아일랜드와 같은 다양한 장소에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에서 후기-갈등(post-conflict)에 성공회가 강하게 참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성공회의 평화와 정의 네트워크가 현재 가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 전통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미카엘신학원과 그의 후계가 되는 성공회대학교는 일본 식민주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분단을 경험하였기에,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활동을 포함하여, 평화만들기와 화해의 이러한 전통에 자금심을 갖는 모든 이유를 갖고 있다. 평화와 화해와 통일에 대한 이러한 소임은 공식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불인정도 성공회 전통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붙들어야 한다.  

결론

과거 한세기 동안 세계 성공회에는 이밖에도 많은 주제들이 있다. 네 가지 영역에 조금 더 추가해 본다면, 성서 해석의 변화하는 방법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성장에 반대하는 앵글로-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숫적 감소, 분열과 갈등과 분파라는 그릇된 흐름들을 변화시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제가 주장한 네 영역들은 중요한 것이라고 믿으며, 지난 한 세기 동안 해방과 자치와 자유를 위해서 성공회로서는 적극적인 개입을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여 성공회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내면 보기와 자기 상태 보호 등을 보여주는 대조적인 형태들도 있다. 하지만 성미카엘신학원과 성공회대학교에 대한 저의 인상은 제가 기술한 네가지 영역들을 갖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관련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잘 지속시킬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번역 봉사 : 김은규)

  1. 역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끈질기게 시기가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는 것을 모토로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페이비언협회의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명칭은 지구전술(持久戰術)로 한니발을 격파한 고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 유래한다. 페이비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특정의 역사관·경제이론·정치학설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초기 지도자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 역사관은 점진적 진보의 낙천론 위에 서 있다. 즉 사회는 기술적 발달과 물질적 부의 증대에 의한 구성원의 행복의 증진이라는 방향으로 진보해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의 내부에 그 존속을 위협할 만한 파괴적 요소가 나타나면, 그것을 극복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한 결과 많은 부(富)가 축적되는 한편 노사의 대립이라든가 도시문제 등의 폐해가 생겼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정책이 대증요법식(對症療法式)으로 취해져 왔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의식적·계획적으로 폐해에 대한 극복책이 취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생활에 적용한 것으로서, 혁명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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