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서울교구장 사순절 사목서신

성공회의 전통과 신앙을 회복하는 사순 절기를 지냅시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 이마가 아니라 가슴에 재를 부으며 여러분의 주교 김근상 바우로가 문안드립니다.


이제 사순절 신앙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한마디로 하느님께 깊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완벽해져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가는 둘째 아들처럼 감히 아버지라 부를 자격도 없으나 일꾼으로라도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진정한 회심과 겸허가 더 아름답습니다. 사순절은 이런 돌이킴과 자기를 비움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제자들과 세례 받은 이들이 경험한 부활은 갑자기 얻은 행운의 기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려움으로 헤아리면서, 예수님을 따라 걸을 때라야 누리는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실패와 고통과 죽음을 맛보면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일은 고통스런 몸부림입니다. 초라하게 쓰러진 육신 위에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붙드시고 일으켜 높여주시는 영광이 부활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못 자국, 창 자국의 상처가 선명한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랑하는 성공회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부터 우리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게 운영해왔던 사회선교기관 중에 성직자가 책임자로 일하는 한 곳이 그만 말씀드리기도 민망한 과오를 노조와 정부로부터 지적받았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선교적 열정이 안으로 쌓인 무지와 허욕을 은폐한 탓입니다. 이에 따라서 도덕적 책임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교구가 상당히 큰 액수의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공회빌딩을 임대 관리하는 과정에서도 기대 수익에 못 미치는 이유가 교구장의 관리 책임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목을 통할하는 교구장으로서 하느님과 교회 앞에 부끄럽고 송구한 사죄의 마음을 올립니다. 시말과 경과를 살피는 일과는 다른 차원에서, 교회의 일치와 치리에 관해 모든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로서 한없는 사목적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이 성찬례의 기도 시간마다 주교인 저를 위해 드려주신 기도를 기억하며, 저의 나약하고 부족한 교구 사목을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자비를 구합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보내는 이 마지막 사순절기는 참으로 제 작은 명예와 자긍심마저 갈가리 찢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교회의 선교 의지와 역량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저는 지난 1월 피선주교님께 교구의 실질 행정과 치리의 권한을 일체 위임하였습니다. 지난 2월 14일, 피선주교, 성직자원 의장, 평신도원 의장과 함께 사안의 중대성을 공유하고 모든 이후의 일정을 피선 주교님 중심으로 해결하기로 한 바 있습니다. 저로서는 새로운 희망으로 도약을 시작할 새 피선 주교와 교회공동체에 이러한 아픈 현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넘겨드리며 퇴임을 하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을 줄여가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새 피선주교의 너그럽고 따뜻한 신앙과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일 처리에 교회가 미래를 맡기며 큰 기대를 걸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제가 빨리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받아들여서 새 주교님의 성품과 교구장 승좌식을 오는 4월 25일에 함께 봉헌하여 제 사임시기도 앞당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교우, 성직자, 수도자,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 전체 안에서 우리 신앙 전통에서 나오는 더 깊은 식별과 선교의 의지를 최대한 모으고 살려야 할 때입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제 직무와 역할은 그동안 많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저의 퇴임과 함께 혁신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그동안 성직자와 교우들 모두 지역 교회와 현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선교와 사목을 해오셨습니다. 교구장인 저는 최대한 그 자율적 책임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성직자의 복지를 위해 안정된 재원을 마련하기 원했습니다. 성직자 재교육을 통해 사목자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고, 평신도께도 신자 양육을 통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기대했습니다. 나름의 결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저 자신과 교구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명분으로 옳다고 해서 다 교회공동체에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이 더욱 깊은 식별과 결단으로 이런 일들을 훌륭히 완결 짓지 못한 점이 참으로 뼈아픕니다. 새 교구장께서 무거운 짐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짐을 나누시고 힘을 더해 주시어 더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성직자 여러분,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교회 전통이 마련한 성직의 질서를 바로 세워주십시오. 이번 사안에 관한 한 교구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료 성직자의 우려와 충정 또한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주교의 치리가 불안하다 해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성공회가 가지는 지향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주교직은 일치의 상징이며, 선교를 위한 의지와 실천의 기둥입니다. 주교 개인이 아니라, 주교직의 권위가 흔들리면 우리의 선교는 더 험난해질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뚫고 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동료 성직자 여러분들은 더 많은 기도와 조력으로, 주교의 직분을 완성 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성직자에게 사목에 관한 한, 맡긴 사역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일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위임한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한두 분의 일탈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직자를 믿어 주십시오. 그 믿음이 교회의 바탕이 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열심히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교의 권위를 위임받아 가르치고 이끄는 성직자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세워주십시오. 성직자가 이끄는 기도와 신앙 교육 안에서 세상의 가치와 마음은 불살라 버리시고, 교우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익히고 갖춘 여러분의 전문성을 기쁘게 교회와 선교를 위해 봉헌해주십시오.


사순 절기를 지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때에 저는 이제 교구장 주교로서 물러나게 됩니다. 주님과 교우 여러분의 사랑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보상이나 명예를 위해 주교직을 감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포부와 기대가 컸기에 아쉬움과 서운함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제 공과를 맡겨드리고 교우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를 가슴에 깊이 안고 떠나려 합니다.


성공회 안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함께 한 모든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성공회는 오늘의 흔들림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기초 위에 다시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좌절과 체념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과 열정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고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직자와 평신도 여러분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공회의 형제자매 여러분,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식별이 곧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꾸짖으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의 용기가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게쎄마니에서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바치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 부끄러움을 하나도 덜어내지 않고 그대로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치료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자신을 종으로 내려놓으신 겸손의 은총 안에서 사순절기의 여정을 시작하는 교우 여러분의 믿음이 우리 성공회를 되살리는 부활의 축복으로, 새 주교의 풍성한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기원하며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2017년 3월 1일 재의 수요일에

서울교구장 주교 김근상 바우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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